[아주로앤피]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역주행으로 9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7명을 다치게 한 대형 교통사고와 관련해 '급발진'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사고 차량이 긴급 제동장치의 ‘원조’ 격인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G80인데도 정작 사고 땐 해당 장치가 먹통이었다는 점에서 차량 결함 가능성이 제기된다.
4일 경찰에 따르면 16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서울 시청역 역주행 교통사고와 관련해 가해 차량인 제네시스 G80(2018년식)의 구체적인 속도와 급발진 여부, 제동장치 작동 여부 등을 규명하기 위해서 지난 2일 해당 차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조사 내용과 목격자 진술, CCTV 및 블랙박스 영상과 국과수 감식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해 운전자 차모씨(68)는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다. 사고 직후 차씨는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형, 이거 급발진이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경찰은 "급발진은 피의자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경찰은 차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지난 2일 입건했다.
차씨가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어 시선은 제네시스 G80 제조사인 현대자동차로 쏠리고 있다. G80은 2008년부터 생산된 준대형 고급 세단이다.
문제는 이 차량이 국내에서 최초로 도입한 긴급 제동장치가 사고 때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브레이크등이 들어오지 않은 것도 시스템 전체가 고장났기 때문이란 전문가 분석이 제기된다.
자동차 정비 명장으로 통하는 박병일 카123 대표는 이날 라디오에 출연해 “제네시스는 어떤 물체를 만나면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긴급 제동 장치가 돼 있는 차량”이라며 “저 차(제네시스)부터 (장착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긴급 제동장치는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차량 시스템이 자체 판단해 위험한 순간 차를 멈춰주는 장치다. 요즘 상당수 차종에 기본적으로 장착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는 “운전을 잘못했다 하더라도 긴급 제동장치가 작동됐으면 저렇게 사고까지 안 날 수 있는 차인데 (그 장치가) 다 먹통이 됐다”고 지적했다. 급발진 여부를 떠나, 제네시스에 들어가 있는 긴급 제동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건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2018년 제네시스의 해당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해 리콜을 했다”면서 “확인해봤더니 (사고를 낸) 저 차가 리콜은 받았더라”고 전했다.
‘브레이크등이 들어오지 않아 운전자가 급제동을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과 일부 시민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내놓았다.
박 대표는 “저 차(제네시스)는 브레이크 밟으면 컴퓨터(ECU)가 브레이크등을 켜줄 것인지를 판단하는 시스템”이라며 “그 시스템이 이미 이상이 생긴 상태였다면 브레이크등이 안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는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CCTV라든가 블랙박스 EDR 자료를 더 면밀하게 봐야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단은 그 운전자의 과실은 3, 그 다음에 자동차의 결함 문제 즉 자동차의 어떤 제어 문제가 있었다 7로 본다”고 분석했다.
시청역 사고의 원인이 급발진으로 드러날 경우 현대차도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다.
우선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금은 차씨가 가입한 종합보험사에서 급발진과 상관없이 전액 지급하게 된다. 다만 추후 사고 원인이 급발진으로 밝혀지고 제조사인 현대차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보험사가 현대차를 상대로 구상권 청구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 구상권이란 채무를 대신 변제해 준 사람이 채권자를 대신해 채무당사자에게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하지만 교통사고에서 급발진이 인정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이번 사고도 현대차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난 5월까지 15년여간 급발진 의심 차량 신고 건수는 총 793건이다. 하지만 민사소송에서 제조사 과실을 인정한 확정 판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2020년 10월 서울 관악구에서 제네시스 G80 차량이 급가속한 뒤 버스를 들이받고 멈춘 사고에서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했지만 지난 1월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은 원고 패소 판결 한 바 있다. 같은 해 경기도 판교에서 볼보 S60이 굉음을 내며 질주하다 국기게양대를 들이받고 멈춘 사고에서도 재판부는 원고의 급발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소비자가 승소하기 어려운 이유는 현행 제조물책임법상 자동차 급발진 사고의 입증책임이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문가가 아닌 일반 소비자가 차량에 결함이 있었음을 증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때문에 21대 국회에서 제조물책임법상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최근 (운전자가) 급발진을 주장하는 사고가 많은데 급발진이 인정될 경우 해당 제조사로서는 손해배상 책임은 물론이고, 민사소송에서 최초로 제조사 책임이 인정된다는 측면에서 이미지 타격도 커 제조사들이 이런 사고들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어 "(시청역 사고에서) 만약 급발진이 인정될 경우 현대차는 공동 불법행위자로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며 "다만 분담 비율 등에 대해서는 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대차 측은 "경찰에서 수사 중인 형사사건을 두고 현재로선 회사의 입장을 밝힐 게 없다"고 전했다.
한편 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지난 1일 오후 9시 27분께 차씨가 운전하던 제네시스 차량이 시청역 인근 웨스틴조선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후 일방통행 4차선 도로를 역주행하다 왼편 인도로 돌진했다.
경찰은 차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체포의 필요성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이를 기각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께 차씨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해 차씨를 상대로 첫 피의자 조사를 실시했다. 차씨는 이번 사고로 갈비뼈가 골절돼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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