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성인지 감수성' 언급 후폭풍…거꾸로 간 판결에 경찰도 역주행

남가언 기자 입력:2024-05-29 16:11 수정:2024-05-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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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 1월 "피해자 진술 무제한 인정 안돼"

  • "판례 변경 아냐" 해명에도 수사 일선 혼선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법원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월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다소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판례를 내놓자 일선에서 벌써부터 후폭풍이 일고 있다. '성범죄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견지하더라도 피해자 진술에 따라 무조건 피고인을 유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오자 수사기관이 촘촘한 증거를 요구하는 등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성폭행·성추행 피해자들이 형사 고소를 할 때 고소장 작성과 증거 제출을 이전보다 깐깐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장에 피해 사실을 적을 때 정확한 날짜가 특정되지 않거나, 피해 상황을 자세히 적는다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녹취 등 증거가 없으면 받아주지 않는 식이다. 성폭행 피해자 고소 대리를 많이 맡아온 변호사들은 검찰에서 보완수사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호소했다. 
 
최근 한 성폭행 피해자 고소를 돕고 있다는 A 변호사는 "피해자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횟수는 수십번에 달하지만 이 중 정확하게 상황을 녹음한 건은 4건에 불과했다"며 "경찰이 증거 제출을 엄격하게 요구해 녹취록이 있는 4건 밖에 고소를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법조계는 최근 대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판례가 변경되면서 수사기관의 분위기도 이같이 변했다고 보고 있다. 2018년 4월 대법원은 한 대학교수가 여학생을 성희롱한 사건에서 교수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정립했다. 
 
원심은 여학생이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날짜 이후에도 대학교수와 격의 없이 지냈다는 점에서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성인지 감수성 판례는 비서를 성폭형 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안 전 지사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과 피해자로부터 피해 사실을 전해들었다는 제3자의 진술이었다.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 법리에 따라 이들의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 안 전 지사에게 유죄를 확정했다. 
 
하지만 지난 1월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이 도마에 올랐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원심이 유죄로 판단한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하면서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언급했는데, 이전 '성인지 감수성' 판결의 취지와 다른 판결이 나온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원심이 유죄로 판단한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피고인이 지하철에서 여성 피해자에게 신체 접촉을 해 기소된 이 사건의 쟁점은 피고인에게 ‘추행의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대법원 2부는 피고인이 자폐성 장애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신체 접촉을 했을 수 있다며 추행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이 판결을 내리면서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언급한 대목이다. 대법원 2부는 기존 판례에 대해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하거나 그에 따라 해당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성범죄 피해자 진술에 대해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보더라도 진술 내용 자체의 합리성·타당성 뿐만 아니라 객관적 정황, 다른 경험칙 등에 비춰 증명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판시했다.

누가 봐도 기존 성인지 감수성 판례와 달리 판단한 것으로 읽힌다. 논란이 일자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이 믿을 만한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의 사정을 고려하면 유죄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일 뿐 기존 판례를 반박하거나 바꾼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일선에서는 우려했던 대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피해자다움'의 관점에 갇혀 있던 '성인지 감수성' 판결 이전으로 분위기가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B 변호사는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더라도 피해 날짜가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으면 고소를 받아주지 않는 등 성폭행 피해자 고소 대리를 많이 하는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경찰의 분위기가 작년과 올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며 "대법원에서 이같은 취지의 판결이 계속 나오게 되면 2018년 이전처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무력화하는 상황까지 올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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